그나의 덧: 대학생의 무게는 어쩌면 꽤 가벼울지도.

우리는 젊지도 않고, <청춘>스럽지도 않다.



사사로운 사설

대학생이라는 단어의 무게


글 제원 / 그림 그나 / 편집 새봄



BC 387년경 플라톤이 설립한 ‘아카데미아’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대학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왔다. 그 과정동안 대학은 대략 3가지 정도의 기능을 갖췄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교육’과‘ 연구’이고 세 번째는‘ 봉사’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대학의 기능을 단순히 이 3가지에 국한할 순 없다. 높은 수준의 지식을 습득하는 환경과, 젊음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이 혼합된 대학은 국가와 사회의 가장 깨끗한 시각과 주관을 가진 대학생을 양성하는 기능을 한다. 예컨대 7·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이나 97년 IMF 당시, 대학생은 민주주의 수호와 국가 경제 보호라는 목표를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이 사회의‘ 유지’, '발전’을 대학의 또 다른 기능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생’이란 단어에 담긴 인식과 깊이는 사회를 발전적이고 올바른 형태로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기엔 힘이 떨어져 보인다. 대학생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한국사회에서 갖는 평균적인 위치는 젊은(화끈한) 소비자, 취업준비생 , 그 언저리 쯤 될 것이다. 언어에 대한 감정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 수렴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도 대학생의 역할은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단어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지방대 출신’이나‘ 아줌마 같다’라는 말이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대학생이 무기력하면 대학생에 대한 사회적 대우도 그럴 수밖에 없다. 수많은 대학생이 거리로 나가 반값 등록금을 외쳐도 그 뿐, 실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알바 시급 문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들어갔으며 대학생의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는 더욱 심해졌다. 취업을 위해 요구하던 5대 스펙은 8대를 넘어 9대까지 늘어났다. 이것을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치부해선 안 된다. 현재 대학생이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모두 대학생들 스스로 그 위치에 부과된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란 이름으로 짊어진 위치는 열심히 공부한 뒤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해서 가정과 국가에 이바지하는 전(前) 단계쯤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교환학생이나 인턴 등 대외활동을 하면서 견문을 쌓는 것에만그쳐서도 안 된다. 취업을 위한 활동과 삶에 있어 가치관과 주관을 찾는 과정은 다르기 때문이다. 생각의 뿌리를 가져야 올곧은 주장과 확신에 찬 행동이 가능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골방에 틀어 앉아 지식을 쌓기 보다는 성찰을 거친 주관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행동할 수 있는 양심을 길러야 한다.



용기와 주관을 가져 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진보 성향의 대학생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수를 표방하며 사회 문제를 냉소적이고 무관심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 최근 8개 국립대 학생들이 낸 기성회비 반환소송이 2심까지 승소했다. 대법원에서 마저 이 판결이 확정 될 경우 무려 13조원에 달하는 기성회비 반환소송이 이어질 전망이다.



하지만 정작 학생들은 관심이 없다. 경북대 총학생회가 재학생 1,10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0% 가까운 학생은 소송 자체를 알지 못했다. 반면 법률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난 기성회비의 급여보조성 경비지급은 경북대학교가 636억 원으로 가장 높았다. 이를 단순히 수치적으로 접근하면 학생당 10만 원가량이 환급되고 말고의 문제지만 이 소송을 통해 기성회비 징수를 중단하고 수업료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절할 수 있다면 반값등록금의 시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반값등록금엔 찬성해도 구체적인 방안과 실현 가능성에는 관심이 없다.



지난 10월 또 한명의 대학생이 자살을 했다. 가족이 함께 살던 두 칸짜리 월세 방 보증금으로 학교를 다니다 미래에 대한 비관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자유죽음」을 쓴‘ 장 아메리’는 거짓과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비천한 삶을 유지할 바에야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하지만 이 죽음에 세상은 무관심하고 변하는 것은 없다. 더 이상 비천한 삶이 싫다면 대학생들은 다시 사회의 중추적인 기능을 해야 한다. 20대는힐링 받을 대상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그 위치를 증명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학생이란 단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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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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